스크랩 이모저모53 [스크랩] 그를 깁다 2016. 3. 13. 그를 깁다 이 희라 남편의 방한복을 손질한다 지퍼를 올리려니 꼼짝 않는다 그가 걸어온 길이 지진으로 찢어진 도로처럼 두 갈래로 갈라져 봉합되지 않는다 녹슬어 이가 빠진 지퍼 혹한의 거리에서 가족을 위해 자신의 어금니가 뽑히는 것도 참아낸 걸까 일거리를 파헤치던 소맷귀는 낡아 헤어져 탄력을 잃고 말없이 삼키고만 사연들이 실밥마저 닳아터진 자리에 삐져나오다 말고 주춤거린다 살며시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본다 싸늘한 동전 한 닢 한 푼이라도 아껴 쓰려던 그가 자린고비로 살아온 삶의 비늘이다 작은 일에 투정하며 쐐기를 박았던 말들 묵묵히 받아넘기며 살아온 그이 터진 옷을 깁다말고 가벼워진 방한복을 와락 안아본다 출처 : 정순 시인의 시밭 글쓴이 : 감나무 원글보기 2022. 8. 5. [스크랩] 제주 4.3 평화문학상 제 3회 2016. 3. 13. 무명천 할머니 / 최은묵 할머니 얼굴에는 동굴이 있죠. 동굴은 쇠약한 바람의 입 고장 난 피리처럼 구멍에서 침식된 총소리가 쏟아져요 해풍이 불 때면 바람의 말을 새로 배우느라 밤새 빈병 소리를 내던 할머니 바닷물이 턱에 머물다 가면 정낭 올리듯 동굴 입구를 무명천으로 감싸야만 했어요 저 흰 천은 누굴 위한 비석인지 얼굴에 백비 동여맨 채 바다를 읽는 무명천 할머니 파도가 절벽을 적시듯 침을 흘려요 침은 닦지 못한 비명 숱한 어둠이 동굴에 터를 잡을 때마다 남몰래 뜰에 나와 달빛을 채워 넣었죠 수명을 다한 빛이 녹슬고 완성되지 못한 낱말들 진물처럼 떨어지면 새 무명천 꺼내 빗장을 걸던 할머니, 혼자 떠나요 바람의 언어를 중얼거리며 동굴 벽 짚고 떠나요 이제 동굴은 메워지고 피리소리는 멈추겠지요 잃어버린 턱.. 2022. 8. 5. [스크랩] 2011 평사리 문학대상 시부문 당선작 폐선 2016. 3. 13. 廢船 정 순 저녁의 딱딱하고 고단한 파도 한 켠에 세월 하나 뒹굴고 있다 부력의 한쪽을 추억으로 비워낸 듯 기우뚱 균형을 놓아버리고서 낡은 부피를 달래고 있다 얼핏 보아 고기들의 길을 단념한지 오래인 듯한, 따라온 길 파도에 녹이 슬어 보이지 않는다 저 배도 한때는 사랑을 했거나 어느 이름 모를 추억 속에서 며칠이고 향긋한 정박을 했을 것이다 불 켜진 환락의 깊이를 쏘다니거나 가슴 속으로 저며드는 이름 모를 물살들에게 운명을 맡기며 추억을 탕진했을, 나 이쯤에서 저 배의 소멸들에 대해 받아내려 한다 기억 속 깊이 끼어있는 몇줌의 항해일지와 폐유같은 어둠 저쪽에서 환락을 장만하던 나폴리 마르세이유 요코하마의 날들과 며칠이고 정지된 엔진 근처에서 뜬눈으로 보내던 불임의 위도와 경도를 짚어보려 한다 이튿날이면.. 2022. 8. 5. 제 4회 중봉조헌문학 우수상 수상 2016. 3. 3. 발 바 닥 제 4회 중봉조헌문학 우수상 수상 정 성 희 어찌 저리도 못생겼을까. 작다 못해 땅에 붙은 난쟁이 모습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신조차 고개를 가로젓는다. 신은 그에게 남몰래 어두운 곳에서 소금으로 절여진 밥을 평생토록 빚어내게 명하시며 무기징역이라는 천형을 선고하셨다. 창세기 몇째 날, 창공을 비상하는 새들에게는 씨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먹이신다고 말씀하셨다. 식물들에게는 이파리에 엽록소를 심어주어 햇빛과 물만으로도 굶지 않게 만드셨다. 심지어 하느님이 등 돌린 뱀조차 어쩌면 그보다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뱀은 신진대사가 느려 일 년에 단 한 번의 먹이로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끼의 양식도 거를 수가 없는 우리 인간은, 아.. 2022. 8. 5. 제 10회 동서커피문학상 은상 2016. 3. 3 머리카락 (제 10회 동서커피문학상 은상) 정 성 희 거울 앞에서 빗질을 한다. 처음에는 대담하고 큰 동작으로, 그 다음에는 작고 세밀한 손질로 머리를 빗는다. 유난히 숱이 많고 긴 탓인지 아무리 다듬어도 이내 헝클어지고 만다. 여러 번의 쓰다듬 끝에 깔끔한 정도는 아니지만 남들 눈에 지저분하지 않을 만큼 가지런한 모습이 되어간다. 참빗으로 골이 생기지 않게 촘촘히 쓸어내려진 머리카락이 피부에 닿는 것을 느끼며 얼굴 주위를 감싼다. 그 흑단의 물결 속에 두 눈을 담그면 검은 머리칼은 큰 파도가 되어 살아있는 내 주위의 모든 의식을 움켜쥔다. 곱슬곱슬한 머리, 구불구불한 머리, 삐죽삐죽 세운 머리, 땋아 늘인 머리, 손바닥처럼 매끄러운 민머리... 출렁이는 바다 안에 그 길이와 올의 굵기에 따라 다양한 형.. 2022. 8. 5. 제12회 전국장애인과 함께하는 문예글짓기대회 대회장상 2016. 3. 3. 지렁이/정 성희 (제12회 전국장애인과 함께하는 문예글짓기대회 대회장상) 내리치던 빗방울이 그쳤다. 물기 머금은 꽃무더기 아래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숨어있다. 새처럼 쪼그리고 앉아 그놈을 훔쳐본다. 몸통은 접시 위에 얹어진 생문어 다리같이 오그랑망태기다. 지렁이란 놈이다. 징그럽게 꿈틀대는 모양새로 보아 이름이 그렇게 불리어졌나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더니, 그놈의 해괴망측한 몸매무시는 연체동물의 품위를 망가뜨리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하고많은 먹이 다 제쳐두고, 하필이면 인간이 버린 지저분한 쓰레기나 더러운 오물덩이를 먹고 땅속에서 주린 배를 채우다 보니 겉모습이 저리도 흉측하게 변했나 보다. 지렁이는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자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 2022. 8. 5. 이전 1 2 3 4 5 6 7 8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