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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금상] 누름돌 /·송종숙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금상] 누름돌 송종숙 장아찌를 담글 때마다 늘 아쉬운 게 누름돌이다. 마땅한 누름돌이 없어서다. 누름돌이란, 장아찌를 담글 때, 항아리 속 재료가 뜨지 못하게 맨 위에 얹어서 지그시 눌러주는 묵직한 돌덩이를 말한다. 대개, 채석장에서 깬 듯, 날 서고 반듯한 돌덩이 보다는 세월의 물살에 닳고 닳아 둥그스름하고 묵직하고 반들반들한, 그런 돌덩이를 누름돌로 쓴다. 양파나 깻잎 등, 해마다 장아찌를 한두 번 담는 것도 아닌데 나는 매번 장아찌 담글 때서야 누름돌을 챙기곤 한다. 생각해보니, 내가 평생토록 살림고수가 못 되는 이유가 바로 그런 부분이었지 싶다. 여름철에 오이지 담글 때는 반드시 누름돌로 눌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남쪽 출신이라서 서울내기들처럼 오이지를 즐겨 담.. 2022. 8. 5.
[스크랩]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항아리 항아리 - 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 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 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 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 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 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 나는 햇살을 움켜쥐고 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 아주 오랫동안 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 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 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때마다 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 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 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 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 내게 저장된 세월을 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한라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작] 항아리 2005년 01월 01일 00시 01분 .. 2022. 8. 5.
[스크랩]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리운 약국 배정원 세번째 약국엔 새장이 있었다 햇살은 넉넉하였고 한 쌍의 카나리아는 진통제를 쪼고 있었다 구리반지보다 더 가느다란 손이 진열자를 열면 아스피린들, 눈처럼 쏟아져 아직 녹지 않은 눈은 눈물겨웠다 병든 과일나무 분재의 웃음이 석유 스토브의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던, 겨울 아침 저물 무렵 시장골목이 끝나는 곳에 세번째 약국이 있었고 그곳엔 소복을 걸친 약사와, 정적과, 불치의 병이 있었다 캡슐에 든 흰가루를 드링크제의 목을 비틀어 마셔도 해독되지 않는 날들은 식도의 어디쯤에서 분해되는가 유리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면 햇살은 또 그렇게 저희끼리 몰려다니며 깔깔대고 있었다 출처 : 정순 시인의 시밭 글쓴이 : 감나무 원글보기 2022. 8. 5.
[스크랩]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담쟁이 덩쿨 담쟁이 덩굴 조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 2022. 8. 5.
[스크랩] 주유소 주유소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 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두 우회로에 있다 출처 : 정순 시인의 시밭 글쓴이 : 감나무 원글보기 2022. 8. 5.
[스크랩] 2014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작 2016. 3. 13 뉴스홈 >특집 > 신인문학상 입력 2013.12.18 20:11 길고양이 시 당선작 다음엔 용서 할 수 없어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가볍고 은밀한 흔적들 생선과 맞바꾼 몇 개의 발자국 속엔 아직도 비린내의 안쪽을 훔쳐봤을 집요한 눈빛이 묻어있고 문 열린 주방 한 켠 함지박에 담가놓았던 저녁의 분량만이 온데간데없이 썰렁하다 도둑맞은 함지박 속의 물들은 꺼른하다 아직도 미련을 놓지 못한 듯 우물거리고 있는 갈치의 미세한 비늘만이 느릿한 공복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 한때 함지박 속의 사연들은 내 오랜 날들의 청빈을 닮았다 쉽사리 쏟아버리기엔 못내 아쉬운 애증의 볼모같은 것 나는 오랫동안 비린내 어린 시장기를 구해와 어스름의 도둑들을 초대해 왔다 한낮의 환한 부주의를 풀어 놓고서 공복의 저녁들을 키워 .. 2022.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