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크랩 이모저모

[스크랩] 2011 평사리 문학대상 시부문 당선작 폐선 2016. 3. 13.

by 푸름(일심) 2022. 8. 5.

廢船

 

               정 순

 

저녁의 딱딱하고 고단한 파도 한 켠에

세월 하나 뒹굴고 있다

부력의 한쪽을 추억으로 비워낸 듯

기우뚱 균형을 놓아버리고서 낡은 부피를 달래고 있다

얼핏 보아 고기들의 길을 단념한지 오래인 듯한,

따라온 길 파도에 녹이 슬어 보이지 않는다

저 배도 한때는 사랑을 했거나 어느 이름 모를 추억 속에서

며칠이고 향긋한 정박을 했을 것이다

불 켜진 환락의 깊이를 쏘다니거나 가슴 속으로 저며드는

이름 모를 물살들에게 운명을 맡기며 추억을 탕진했을,

나 이쯤에서 저 배의 소멸들에 대해 받아내려 한다

기억 속 깊이 끼어있는 몇줌의 항해일지와

폐유같은 어둠 저쪽에서 환락을 장만하던

나폴리 마르세이유 요코하마의 날들과

며칠이고 정지된 엔진 근처에서 뜬눈으로 보내던

불임의 위도와 경도를 짚어보려 한다

이튿날이면 폐유처럼 떠오르던 희망이라는 낯선 부력의 위로는

어느 해협에서 배운 악몽이었을까

나는 조용히 언젠가의 서풍이 불어와

가슴 속에서 일러주었던 말이라도 실천하듯

관념 속 무례한 부력을 내려놓고서

노을이 내주기 시작하는 저녁 쪽으로 어스름한 귀향을 한다

 

 

 

당선소감

 

오랫동안 망각의 해안가에 폐선 하나 방치하고서 살아왔다.

내 유년의 부력이 더는 그 배를 띄워줄 수 없던 그 어두침침한 날들의 한 기슭에서부터

내 폐선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잃어버린 항해의 지도와 언젠가 숙녀가 되면

깃들겠다던 몇 개의 항구들은 금지되고 말았으며 그럴 때에도 희망은 어쩔 수 없는 내 몫의

잔물결처럼 폐선을 다독여주곤 했을,

나 지금 그 폐선을 깨우려 한다. 이른 아침의 해맑은 출항을 꿈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초저녁의 그을음 낀 절망을 위로하기 위해 그 불구의 발선을 움쩍 떠밀어보려 한다.

그리곤 다시 내 몫의 얘기를 할 차례

기쁨이 앞서면 지혜가 가려진다고 했던가

당선을 하룻밤 유예한 채 넘어온 이른 아침, 기쁨은 한 통의 전화로 나에게 꽂혔고

어쩌면 이제부터가 내 안의 수사들에게 미래의 고뇌와 고통의 희열에 대한 선악을 물어야 할 시간

늘 묵묵한 시선으로 내 초행의 길을 지켜봐 준 한 남자와 세 아들

그리고 차령문학 동인들

어두운 수사의 길을 야광처럼 밝혀주신 박 경원 선생님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토지문학에게도 머리 낮추어 고마움을 담습니다.

 

 

 

평사리문학대상 시 심사평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주목을 끌었던 작품은 폐선, 담, 풀스윙, 원시를 탐하다, 죽어(竹語), 헬로우 ET, 구두 속의 귀뚜라미 등 일곱 작품이었다.

이들 중 단연 돋보였던 작품은 풀스윙 이었다. 드라마틱한 텐션도 좋았고 삶의 구원의지로서 밀고 가는 동사 언어의 주제 표출도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태천 시인의 ‘스윙’(김수영문학상 수상시집)의 연작시에 눌려 있어 당선작으로 내세우기에는 합당하지 않았다. 이를 제외한 위의 작품들 중 ‘폐선’과 ‘구두 속의 귀뚜라미’가 최종 논의의 대상이었다. 오랜 심사숙고 끝에 ‘폐선“을 당선작으로 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부분의 작품 경향들이 관념의 실체는 있어도 언어화 되는 과정에서 서정의 육화와 미적 감동을 잃고 있음이 그 이유였다. 돌발적이고 기발한 상상력들은 뛰어났으나 언어에 눌려 주제가 무겁고 관념으로 흘렀다는 점이다. 당선작 ‘폐선’역시 이 약점을 보완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즉 체험된 사실과 체험되지 않은 사실은 엄연히 구별된다. 주제가 관념적으로 흘렀다는 지적으로 “관념 속 무례한 부력을 내려놓고서”라는 문장이 약점으로 드러났으나 작품 전반에 무게가 실려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읽혔다.

아쉽게 탈락한 ‘구두 속의 귀뚜라미’는 일상적 체험으로 가벼우나 신인다운 참신성, 주제가 언어에 눌리지 않은 점, 경쾌, 가벼움이 오히려 참신성에 풀러스 요인으로 읽혔으나, 작품의 가벼움을 이겨내지는 못하였다. 당선작의 관념적 시어는 옥에 티 같은 흠으로 남는다. 당선을 축하드리며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송수권(서), 오생근

출처 : 정순 시인의 시밭
글쓴이 : 감나무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