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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전국장애인과 함께하는 문예글짓기대회 대회장상 2016. 3. 3.

by 푸름(일심) 2022. 8. 5.

지렁이/정 성희   (제12회 전국장애인과 함께하는 문예글짓기대회 대회장상)

 

 

내리치던 빗방울이 그쳤다. 물기 머금은 꽃무더기 아래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숨어있다. 새처럼 쪼그리고 앉아 그놈을 훔쳐본다. 몸통은 접시 위에 얹어진 생문어 다리같이 오그랑망태기다.

 

 

지렁이란 놈이다. 징그럽게 꿈틀대는 모양새로 보아 이름이 그렇게 불리어졌나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더니, 그놈의 해괴망측한 몸매무시는 연체동물의 품위를 망가뜨리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하고많은 먹이 다 제쳐두고, 하필이면 인간이 버린 지저분한 쓰레기나 더러운 오물덩이를 먹고 땅속에서 주린 배를 채우다 보니 겉모습이 저리도 흉측하게 변했나 보다.

 

 

지렁이는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자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아주 못마땅하게 대하는 작은 생명들에게조차 할 말을 똑 부러지게 내뱉지 못하는 어리벙한 미물에 불과하다. 자신의 몸뚱이는 그저 포식자들의 간단한 요기로만 채워질 뿐이다. 세상의 그 어떤 풍경과도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서러움이 복받쳐 그만 울부짖는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신의 분노로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형벌을 받았다지만, 자신은 대체 어느 신의 노여움을 사서 만물들의 미끼로 갈기갈기 몸뚱이가 뜯긴단 말인가. 눈물이 빗물인 양 땅속으로 스며들어 요동치는 가슴을 흠뻑 적신다.

 

 

이를 긍휼히 여기신 신은, 찌그러진 모양이라도 기울면 기운 대로 그 쓰임새를 따로 정해주셨다. 제 몸뚱이가 두 동강이 나도 아픔을 견딜 수 있는 내성을 길러 주고, 삶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도 불어넣어 주셨다.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지렁이같이 힘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山)을 부스러기로 만드는 엄청난 일을 이루리라고 예언하지 않았던가. 한갓 물고기의 미끼 정도로 사용될 만큼 아주 보잘것없는 하등 연체동물이 우리 발밑에서 초록을 일구는 큰일을 해내리라고, 신은 미리 점지해 두셨던 것이다. 빙산도 보이는 부분보다는 물속에 감추어진 부분이 더 크듯이, 밟으면 꿈틀대는 정도의 무기력한 존재로 인식되어 온 눈 먼 생물이, 덩치는 저래도 속은 어찌나 다부진지 모른다.

 

 

그래도 마음은 여린지라, 지렁이는 외로움을 많이 탄다. 오죽하면 짝도 없이 혼자 암수 노릇을 할까. 그렇다고 이웃마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다. 거머리도 있고 연가시도 있다. 달은 언제나 때를 어기지 않고 찾아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쏙닥쏙닥 말동무가 되어주는 과묵한 도반이다. 바람은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왔다가, 제 넋두리만 잔뜩 풀어놓고 이내 등 돌려 가버리는 야속한 녀석이다.

 

 

지렁이는 거머리 옆으로 다가가서 또다시 외로움을 달래보기로 한다. 외모 또한 자신과 비슷하니 벗이 되어줄 법하다. 그러나 그놈은 남의 등살에 빌붙어 살면서 눈 한번 거들떠보지 않는 포악한 식충이다. 연가시 역시 배짱세기는 마찬가지다. 사마귀 몸에 들어가 기생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주인의 영혼을 마음대로 지배하며 숙주노릇을 하는 야비한 놈이다. 하지만 지렁이는 뭍에 살든, 물속에 살든 가리지 않고 산짐승들에게 순하게 제 속의 양분을 나누어주고, 제 몸뚱이마저 아낌없이 내어준다.

 

 

언제부터인가 그 놈의 성품을 알게 되면서, 볼썽사납게 생긴 겉모양새가 내겐 외려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보였다. 거친 모래알을 삼킨 조개가 비취색의 아름다운 진주를 품듯이, 지렁이는 세상의 온갖 탁함을 먹고도 향긋한 황토색 흙 알맹이를 배설해낸다. 사리를 입에 물고 늴리리 춤을 추는 지렁이의 몸짓에, 배태한 만물이 초록빛으로 화답한다. 비록 외양은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흙속의 곪은 상처를 다독이고 아물게 하면서 세상을 맑힌다. 작고 못나도 순박하게 논밭을 가꾸는 농부마냥 묵묵히 성실한 삶을 보여주는 지렁이는, 자신에 대한 편견을 가진 세상까지도 정화시켜 준다.

 

 

흔히들 형편없는 사람을 책하거나 욕할 때, 지렁이만도 못하다는 말을 들먹인다. 사실 우리가 지렁이만 하기가 그리 녹록하겠는가. 모양은 저래도 하는 일을 보면, 온갖 공해물질을 양산하며 지구를 오염시키는 인간보다 훨씬 더 윗길이지 않을까.

 

 

하고많은 땅 다 두고 저리 팍팍한 곳에다 제 삶의 터전으로 자리를 잡으니, 사서 고생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곡진한 연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볼 살이 터지도록 입 안으로 흙을 주워 넣고 휘어진 허리를 움켜쥐며 땅을 쟁기질하는 것은, 아마도 고행을 통해 전생의 업을 씻김질하려는 구도의 몸짓이리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만 하는 지렁이의 고독한 수행이 없다면, 버들가지에 물이 오른들 어찌 푸름을 더할 수 있으리요. 이렇듯 아름다움의 기저에는 늘 희생이 따르는가 보다. 지신 앞에 삼천 배 올리는 지렁이의 기원이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의 가슴도 흥건히 적신다.

 

 

비가 오면 사람이 하도 그리워서 인간 세상에 고개를 내밀어보지만, 딱히 갈 만한 데가 없다.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의 민둥한 모양새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피하기만 해댄다. 문전박대로 쫓겨난 지렁이는 또다시 두리번거리며 길을 떠난다. 가다가 어느 발길에 거칠게 채여 몸뚱이가 으스러지고 두 동강이 날 때도 있지만, 가던 길을 멈출 수가 없다. 디오게네스가 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니며 참된 사람을 찾아다녔듯이, 지렁이 또한 순수한 영혼을 찾으러 안간힘을 다하는 게 아닐까.

 

 

어느 구석진 모퉁이에서 그는 그동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누군가와 맞닥뜨려진다. 언어장애를 가진 좀 모자라는 사내아이다. 나는 그 아이를 잘 알고 있다. 그 애가 아주 어렸을 때 내가 주워다 키운 업둥이 바보 녀석이다.

 

 

세상의 바보들은 그 아이처럼 한결같이 우스꽝스럽게 생겼다. 이름조차도 야무지지 못하고 엉성하기 그지없다. 귀를 닫아 세상의 소리를 잘라버려서일까. 누가 놀려대도 앞니를 헤벌쭉 드러내고 그냥 웃기만 한다. 그렇다고 감정마저 없는 건 아니다. 주위를 살피며 물가에서 목을 축이는 노루보다 더 민감하다.

 

 

숟가락이 제가 떠 나르는 음식의 맛을 모르듯, 빈털터리 성자와 주욱 함께 지내왔으면서도 세상을 살아가는 그 아이의 현명한 지혜를 훔치질 못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고 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무위자연의 도를 설파한 노자 또한 바보의 삶과 같은 맥락을 이룬다. 세기의 두뇌라 불리는 아인슈타인조차 바보를 닮고자 여행을 할 때마다 일부러 삼등 열차를 이용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소탈한 사람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일부가 됨으로써 인생의 참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하지 않던가. 자신을 낮추고 비워야만 벙어리성자가 될 수 있음을 가히 말해주는 듯하다.

 

 

목젖을 내보이며 자지러지게 웃어대는 거지왕자는, 인생을 희롱하는 연극배우가 되어 능글맞게 나의 현재를 묻는다. 그동안 내 삶의 속뜰도 그리 옹골차지만은 않았다. 복잡해 보이는 세상사도 따지고 보면 지극히 단순한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산머루 같은 까만 눈은 내게 말해준다. 문명에 미화된 자아를 자신의 참모습인 양 생각했던 허상의 거품을 걷어내고, 내 안에 그을려진 양심도 설렁설렁 헹군다. 함박꽃같이 벙그러진 바보의 맑은 심성이 가져다 준 아름다운 향기가, 내 안으로 깊숙이 배어들어 잡다한 세상살이에서 오는 들끓던 마음을 퇴마의식 하듯 쫓아낸다.

 

 

신은 땅 위에는 바보를, 땅속에는 지렁이를 인간 세상에 제물로 보내어 이처럼 자연을 살리고 사람들의 고운 심성을 되돌리게 하셨나 보다. 외국에서는 지렁이 개체 수로써 토양 비옥도의 자료로 삼아 땅값을 결정한다고 한다. 또한, 가난하지만 비움으로써 만족을 아는 바보가 많은 사회일수록 행복지수도 높다고 들었다. 아마도 바보는 세상의 명리를 다 벗어던지고, 영혼의 자족을 지향했던 디오게네스 뒤를 이을 이 시대의 마지막 철인인지도 모른다. 한 집안에 그런 위대한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의 선택받은 축복임에 틀림없다. 후세에는 필히 큰 도량을 가진 인물이 나오리라는 복선이기도 하리라.

 

 

내가 삶을 온전히 지탱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에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보잘것없어 보이는, 소외된 생명체들로부터 일상사에 지친 기운을 되찾곤 했다. 그들은 나를 에워싸서 넘어지지 않게 부축해 주었고, 척박하고 그늘진 마음을 청정하게 여과시켜 주었다. 호수가 산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이듯이 말이다.

 

 

바보가 좋다. 순수가 좋다. 그 모자란 듯한 일그러진 삶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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