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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 잎의 여자 1 / 오규원(낭송/단 이) 2013. 12. 12.

by 푸름(일심) 2022. 8. 5.

한 잎의 여자 1  오규원(낭송/단 이)

 

   - 언어는 추억에 걸려있는 18세기형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끄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한 잎의 여자 2

 

   -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는 전차다

 

나는 사랑했네 한 여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 입는 여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여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는 하나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 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한 잎의 여자 3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 같은 여자, 그레뉼 같은 여자, 모카골드 같은 여자, 창 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 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여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 지도 모르는 여자, 봉투 같은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 잎 클로버 같은 여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여자.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여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여자, 바람에는 눕는 여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여자, 창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 서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여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 주지 않는 여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여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 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1978년 발표)

 

 오규원 시인

  1941년 경남 밀양 삼랑진 출생, 2007년 작고. 본명은 오규옥

  서울 예대 문창과 교수 역임

  보통사람이 호흡하는 산소량의 겨우 20%만 들이쉬는 만성폐쇄성 폐질환을

  앓았던 시인은 늘 공기 맑은 한적한 곳에서 살며 고독한 시간과 벗하며 살았다.

  병이 깊어지면서 만년엔 짧은 시를 많이 썼는데, 마지막 시는 병상에서 제자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썼고, 열흘 뒤 유명을 달리 했다. 유고집 "두두" (문학과 지성사 간)가 출간 되었다. 유고집의 서시가 된 마지막 시의 전문을 함께 음미해 본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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