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 묵상
삼백 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하루가 맑았다고
까치가 운다
잡것
* 詩
아무리 하찮게 산
사람의 生과 견주어보아도
詩는 삶의 蛇足에 불과하네
허나,
뱀의 발로 사람의 마음을 그리니
詩는 사족인 만큼 아름답네
* 뻘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
* 함민복시집[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 농촌 노총각
달빛 찬 들국화길
가슴 물컹한 처녀 등에 업고
한 백 리 걸어보고 싶구랴
* 가을 꽃 가을 나비
너무도 오래 당신을 찾아 날고 날았지요
견디고 견디다 나도 모르는 사이 꽃이 되고 말았네요
모든 게 깊어진 가을, 하오나 하직하면
저승의 봄잔치 푸르겠지요
* 마흔 번째 봄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꽃 지는 봄산처럼
꽃 진 봄산처럼
나도 누구 가슴
한 번 울렁여 보았으면
* 서울역 그 식당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
* 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가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국물을 그만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
* 함민복시집[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 산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 晩餐(만찬)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 꽃게
꽃게끼리 만나
먼저 길을 가게 비키라고
시비를 걸다가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기로 합니다
가위, 바위
가위
가위, 바위
가위
가위, 가위
가위
자꾸 가위만 내
승부가 나지 않는데도
서로 이겼다고
양손으로 V자를 만들어 치켜듭니다
옆으로 가기 때문에 그냥 가도 부딪히지 않는다고
바위, 모양 불가사리 기죽어 중얼거립니다
* 선천성 그리움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 저 달장아찌 누가 박아 놓았나
마음 마중 나오는 달정거장//
길이 있어//
어머니도 혼자 살고 나도 혼자 산다//
혼자 사는 달//
시린 바다//
저 달장아찌 누가 박아 놓았나 *
* 함민복시집[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 늦가을 감나무
저거 좀 봐
밝은 열매들이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들고 있는 것 같네
사뿐, 들고 있는 것 같어
대롱대롱 들고 있는 것 같지
그러라고 잎도 졌나봐
어!
구불구불한 가지들이
슬금슬금 펴지네
* 여름의 가르침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린다//
쓰름매미가 울음을 멈춘다//
나비가 새소리 반대 방향으로 몸을 튼다//
일순 배추꽃 노란색이 옅어진다//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잔인함이여 *
* 함민복시집[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 부부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
* 나를 위로하며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
* 그늘 학습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옆산에서 꾀꼬리가 운다
새소리 서로 부딪히지 않는데
마음은 내 마음끼리도 이리 부딪히니
나무 그늘에 좀더 앉아 있어야겠다 *
* 몸이 많이 아픈 밤
하늘에 신세 많이 지고 살았습니다
푸른 바다는 상한 눈동자 쾌히 담가주었습니다
산이 늘 정신을 기대어주었습니다
태양은 낙타가 되어 몸을 옮겨주었습니다
흙은 갖은 음식을 차려주었습니다
바람은 귓속 산에 나무를 심어주었습니다
달은 늘 가슴에 어미 피를 순환시켜주었습니다
* 달과 설중매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흔들리는
마음마저 보여주었으니
사랑인가요//
보세요
제 향기도 당신 닮아
동그랗게 휘었습니다 *
* 함민복시집[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 그림자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뜻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 봄꽃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
* 어머니
까치가 곁가지에 집을 짓지 않듯
어머니 마음 中心에 내가 있네
땅에 떨어진 삭정이 다시 끌어올려
상처로 가슴을 짓는
저 깊은 나무의 마음
저 깊은 풍장의 뜻
새끼들 울음소리 더 잘 들으려
얼기설기 지은 에미 가슴
환한 살구꽃 속 까치집 하나
서러운 봄날
*물
소낙비 쏟아진다
이렇게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몸 낮추어//
수평으로 흐르실 수 있는 게지요
수평선에 태양을 걸 수도 있는 게지요 *
* 초승달
배고픈 소가//
쓰윽//
혓바닥을 휘어//
서걱서걱//
옥수수 대궁을 씹어 먹을 듯 *
* 동자승
깔고 앉은 연꽃에
미안하단 말 대신
살가운 미소 이천오백년
얼굴엔 누런 범벅
달빛만 잡수네
부처님
이빨 없죠
하하하 웃어보세요
* 함민복시인
-1962년 충북 중원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성선설-등을 발표하며 등단, 1998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2005년 제7회 박용래문학상 수상...
-시집 [우울씨의 일일][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말랑말랑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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