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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대한 시 11편

by 푸름(일심) 2022. 8. 5.

그늘에 대한 시 11편 

 詩장바구니 

2013.01.05. 00:09

                                                                 

그늘의 냄새

도복희 

 

 

그네를 타고 있었죠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높이 날아올랐죠

바람이 손톱을 세우고 귓불 할퀴어도

통증이 되살아나지 않았죠

구르지 않아도 하늘로 올라가는 텅 빈 운동장

그네 위 둥실 떠오르던 몸이

한순간 땅바닥에 곤두박질쳤죠

박살난 뼈마디가 살을 뚫고 나왔는데

하나도 울지 않았죠

늘 혼자이던 그림자 안

그 애가 목매단 닭들에게 모이 던져주며

상처를 부풀리고 있었죠

자살한 엄마의 그늘 아래서

자라지 못하는 그 애 마른 눈물 바라볼 때도

심장 박동 수는 일정하게 간격을 맞추고 있었죠

검은 집 담벼락이 담쟁이덩굴 무덤이 되고

겨우내 끊이지 않는 곡소리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갔죠

흉물이 되어버린 그 집 내력에

두 귀 닫아버린 사람들

아침과 저녁이 딱딱하게 흘러가고 있었죠

아무것도 아파하지 않으려고

겨울이 지나갈 때 검은 나무 감은 눈마다

뾰족한 이파리

마디마디 장전하고 있었죠

쉿, 조심하세요

당신 가슴에 탄피가 박힐지도 몰라요

 

 

 

그늘 농사

이종섶 

 

 

추수할 때까지 걱정이 없는 그늘 농사는 

햇볕 농사를 끝낸 늦가을 부터 시작한다

작황이 좋은 햇볕 농법은 일손도 많이 필요하고

억센 잎사귀나 껍데기처럼 버려지는 것도 많으나

그늘 농법은 뿌린 만큼 거둬들이는 대신

수고할 일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다

무엇이든 줄에 묶어 걸어놓으면

거름도 농약도 필요 없는 천혜의 농지에서

노릇노릇 편안하게 익어가는 그늘 작물들

무청이나 배추 겉잎으로 만드는 시래기는

그늘에서 심고 거두는 대표식물, 이곳에서

묵은 맛이 일품인 나물도 뜯어 무쳐먹고

말랑말랑한 곶감도 따서 한 입 쓰윽 먹어본다

초가집이나 기와집에 정이 가는 것은

사방에 둘린 처마에 그늘이 있기 때문

그런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마음도 깊어

누구의 그늘 아래 있어도 위축되지 않고

다른 아이들까지 품어주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의 양식 우거지국 한 그릇

뜨거운 국물 한 숟가락 후후 불어 삼키고

퉁퉁한 건더기 한 입 우적우적 씹으면

안안 가득 고이는 한 무더기 그늘 맛

한 잎 심어 한 잎 얻는 이문 없는 농사라도

이 맛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왼손의 그늘 

우대식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시라

이 가을날 나의 사랑을

얼마 남지 않은 저 잔광의 빛으로

당신을 몰고 가는 일

그것이 내 연애법이다

그 몰입에 얼마나 당신이 괴로워했을 줄

모든 빛이 꺼지고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처럼

당신과 내가 어느 풀밭에 앉아 있다 하자

젓가락을 들어 당신은 내 입에 음식을 넣어준다

음식 밑에 바쳐진 당신의 왼손

그 아래로 그늘이 진다

왼손의 그늘,

지상에서 내 삶이란

당신이 만들어준 왼손의 그늘에서 놀다 가는 일

놀다가 가끔 당신이 그리워 우는 일

코스모스처럼 내 등을 툭 한번 쳐보다가

돌아가는 당신의 늦은 귀가

그림자가 사라질 때

나의 연애는

파탄의 골목길

용재 오닐의 비올라 소리 같은 깊고 슬픈

당신의 오랜 귀가 

 

 

 

그늘 선물-어머니학교 21  

이정록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마라. 

왼손잡이가 이 발 저 발 코뚜레 잡아채도

소 콧구멍은 오른쪽으로 삐뚤어지지 않는다.

오른손잡이가 이 장바닥 저 장바닥 고삐 몰아쳐도

화등잔만한 눈알이 왼편으로 뒤집히지 않는다.

워낭 소리도 코쭝배기에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도

어느 한쪽으로만 쏠리지 않는 법이여.

낭창낭창 코뚜레만 파이다 동강나는 거여.

땀 찬 소 끌고 집으로 돌아올 때

따가운 햇살 쪽에 서는 것만은 잊지 마라.

소 등짝에 니 그림자를 척하니 얹혀놓으면

하느님 보시기에도 얼마나 장하겄냐? 

 

 

등, 나무 그늘  

정지윤 

 

 

다 큰 아이를 업고  

등굣길을 거슬러 오른다

 

척추 휘어진 등나무 그늘에

아이를 내려놓고 잠시

굽은 등을 편다

 

가쁜 숨소리 몰래 듣는 등나무

 

아이의 다리처럼 꼬인 줄기 끝

얼기설기 얽힌 그늘이 환하다

 

나무는 등꽃을 업고

어느 바람의 끝자락까지 걸어온 것일까

쉴 새 없이 그늘을 흔들고

 

버팀목에 업힌 그늘은

흔들리며 한 뼘씩 더 자라나고,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이기철 

 

 

나무의 생각이 그늘을 만든다 

그늘을 넓히고 좁히는 것은 나무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나무는

나무가 뻗고 싶은 곳으로 가서 그늘을 만든다

그늘은 일하다가 쉬는 나무의 자리다

길을 아는가 물으면 대답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만 가서 제 지닌 만큼의 자유를 심으면서

나무는 가지와 잎의 생각을 따라 그늘을 만든다

수피 속으로 난 길은 숨은 길이어서 나무는

나무 혼자만 걸어 다니는 길을 안다

가지가 펴놓은 수평 아래 아이들이 와서 놀면

나무는 잎을 내려 보내 아이들과 함께 논다

가로와 세로로 짜 늘인 넓은 그늘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그늘
임동윤 

 

 

튜울립나무 그늘만 깊어가는 자전거보관소
손발 묶인 시간이 정박해 있다
아득히 지워진 이름표와 녹이 슨 뼈마디
무단폐기물 꼬리표를 달고 푸른 추억을 돌리고 있다
4차선도로를 질주하던 속도는 녹슨 바퀴살에 끼어 있다
지하사우나 환풍기구멍으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에 몸을 맡기고
종일 뒤틀린 안장과 바퀴살이 찜질을 한다
퉁퉁 분 바퀴, 그 무게에 자지러지는 애기똥풀꽃
떠나려해도 꽁꽁 묶여 있는 몸
녹이 슨 것들은 다, 무겁다 

 

 

 

그늘
이상국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강가에서 새들은 날아가고

 

때로는 횡재처럼 눈이 내려도

 

사는 일은 대부분 악착같고 또 쪼잔하다

 

그걸 혼자 버려두면 가엾으니까

 

누가 뭐라든 그의 편이 되어 주는 것이다

 

나의 시는 나의 그늘이다 

 

 

 

그늘이라는 말  

허형만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그 깊고 아늑함 속에
들은 귀 천년 내려놓고


푸른 바람으로나
그대 위에 머물고 싶은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감나무 그늘 아래
고재종

 

 

감나무 잎새를 흔드는 게
어찌 바람뿐이랴.
감나무 잎새를 반짝이는 게
어찌 햇살 뿐이랴.
아까는 오색딱다구리가
따다다닥 찍고 가더니
봐 봐, 시방은 청솔모가
쪼르르 타고 내려오네.
사랑이 끝났기로서니
그리움마저 사라지랴,
그리움 날로 자라면
주먹송이처럼 커갈 땡감들.
때론 머리 위로 흰구름 이고
때론 온종일 장대비 맞아보게.
이별까지 나눈 마당에
기다림은 왠 것이랴만,
감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그래 그래, 밤이면 잠 뒤척여
산이 우는 소리도 들어보고
새벽이면 퍼뜩 깨어나
계곡 물소리도 들어보게.
그 기다림 날로 익으니
서러움까지 익어선
저 짙푸른 감들, 마침내
형형 등불을 밝힐 것이라면
세상은 어찌 환하지 않으랴.
하늘은 어찌 부시지 않으랴.

 

 

 

회화나무 그늘

이태수

 

 

길을 달리다가, 어디로 가려 하기보다 그저 길을 따라 자동차로 달린다. 낯선 산자락 마을 어귀에 멈춰섰다. 그 순간, 내가 달려온 길들이 거꾸로 돌아 가려 하자 늙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그 길을 붙들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 그늘에 깃들어 바라보면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며 펄럭이는 바람의 옷자락, 갈곳 잃은 마음은 그 위에 실릴 뿐, 눈앞이 자꾸만 흐리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할런지, 이름 모를 새들은 뭐라고 채근하듯 지저귀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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