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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경덕의 `빌려 쓰다` 외 6편?, 빛과 소리와 감정의 감별사 / 최선옥 시인 평론가

by 푸름(일심) 2022. 8. 5.

마경덕의 '빌려 쓰다' 외 6편

빛과 소리와 감정의 감별사

최선옥 (시인. 평론가)

 

​  인간의 일상은 비슷한 듯 다르다. 보이는 외양은 거기서 거기 같지만, 내면적 관심사들은 사적인 영역에 존재하기에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다름을 재빠르게 간파해 문학으로 이동시키는 이가 시인이다. 시인은, 사적인 영역의 관심사들을 그 자체로만 보지 않는다. 자신만의 독특한 안목으로 접근, 대상에 동화되어가면서도 이질적인 무언가를 발견해낸다. 그리하여 획득하는 시적 리얼리티가 감동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옮겨오는 사실성은 감동과 멀다. 이는 시적으로 변형시켜야 한다는 것, 경험적 사실에 시인의 시적 정서와 사유를 덧입혀야 함을 뜻한다. 시적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표면적인 질서 너머의 어떤 내면적 질서를 시인은 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대상에 깃든 특성에 잇댄 시인의 정서적인 것, 혹은 시적 의미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시인은 삶에 깃든 의례적인 것을 초월, 시적 대상을 철저히 분석해야만 한다. 자칫 관념이나 사적인 감성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시적 사유의 중심을 잡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마경덕 시인은 외양에 치우치거나 주관에 치우침 없이 철저히 객관자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시적 사유와 감동의 중심을 바로 세우고 있다.

​그가 죽었다

병원에 고액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연장한 시한부 목숨이 끝났다

 정산을 마친 죽음들은 즉시 서쪽의 나라와 계약을 맺는다

임대 기간 중

자해는 인재, 실종이나 사고는 천재지변으로 인정한다

계약을 임의로 파기하면 남은 유족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한다

실연을 당한 P는 제 소유라고 믿었던 애인에게

과다지출한 연애로 끝내 욕실에서 숨졌다

목을 매거나 유서를 써야하는 부채가 가장 악명 높은 부채이다

목숨을 계약한 생일은 반드시 기념을 해야한다

케이크를 망치는 촛불

누적될수록 생의 마일리지는 줄어든다 그가 떠난 자리에 또 다른 불치병이 눕는다

사용료가 인상되어도 어쩔 수가 없다 밀린 이자와 원금은 장례비로 수납하고 임대계약은

끝이 난다

신에게 빌린 몸은 신의 나라로 가야한다

-「빌려 쓰다」전문

 

 

 아무리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죽음은 허무하고 슬프다. 그런 일반적인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껴안고 가야하는 숙명적인 죽음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어 묵직한 상징을 얹기도 한다. 특히 문학에서는 미학적으로 치중하는 면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죽음을 보는 사고가 관념으로 흐르기 쉽고, 과다한 정서노출이 되기 쉽다. 시인은 이러한 정서적 유실을 극도로 자제, 냉철한 객관자적 태도로 시에 접근하고 있다. 그것은 물기 없는 시적 건조성이 아니라 차원 다른 시적 형상화다. 사람의 목숨은 “신에게 빌린” 것이다. 그것은 신과의 “계약”에 의해 임대받은 것이어서 인간은 “임대기간”중 소중히 몸을 관리할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계약을 임의로 파기”하는 것은 본인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까지 고통을 감수하여야만 한다. “자해”라든가 “천재지변”등에 의해 몸이 상하는 것도 계약위반이지만, “목을 매거나 유서를 써야하는” 자살인 경우에는 “남은 유족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생일”은 신과 “목숨을 계약”한 날짜. 인간은 매년 그날을 기념하지만, “촛불”이 많아질수록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어서 그만큼 “생의 마일리지는 줄어”드는 셈이다. 병이 든 시한부 인생은 의사의 치료로 목숨을 연장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이르고, 그 죽음은 “서쪽 나라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이는 죽음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순환적 사고, 영적인 사고다. 인간의 목숨이 신에게 빌린 몸이라는 생각이 도출된 그곳을 들여다보면, 견고한 신앙을 중심으로 한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자리 잡고 있다. 마당에 깔린 그늘이 한 자루다 마루 밑에 웅크린 어둠은 몇 가마니의 무게로 늙었다

 

 

마당에 깔린 그늘이 한 자루다

마루 밑에 웅크린 어둠은 몇 가마니의 무게로 늙었다

 

먼지 낀 시간위에 됫박으로 씨를 뿌린 잡초들

이곳에서 적막은 거름으로 쓰인다

 

뒷목이 서늘한 추녀 끝

그늘에 묶인 씨종자들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고

단단한 고요의 매듭에 피가 마른다

 

겨울의 발톱이 빠지고 뒤꼍에 잔풀이 돋아도

사람의 흔적은 폐허로 남았다

 

눈이 침침한 대추나무

절구통 밑으로 굴러간 묵은 대추 몇 알 더듬는 봄날

 

장대를 휘두르며 빈집을 다녀간

바람의 성대만 늙지 않았다

-「빈집」전문

 

 

 

 

 시적 대상의 허무함과 쓸쓸함을 포착한 시인은 그 정서에 갇히거나 그것을 내치기보다는 제3자의 입장에서 그것들을 관찰한다. 대상이 머무는 정서에서의 헤맴이 아닌, 공존하는 시적 방식을 택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을 자신만의 감정처리 혹은 사유로 가져와 또 다른 의미나 정서로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그것을 위한 과정에서 시인은 시적 표정을 자연스럽게 길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인은 자연에 감정을 잇대어 이치와 의미를 유출해낸다. 자연은, 널리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지칭이다. 자연은 문명을 제외한 모두를 포함한다. 자연도 사람처럼 나름의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는데, 시인은 이를 터득하고 자연에 기대어 사는 인간과 자연 모두를 시적 대상으로 삼는다. “그늘” “어둠” “먼지 낀 시간” “잡초” “적막” “단단한 고요” “폐허”는 ‘빈집’을 대변하는 상황이거나 정서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은 “마당에 깔린 그늘이 한 자루다.” 그늘은, 실제 햇살 드리운 지붕이나 나무 그늘일 수도 있고, 근심 걱정 등 어두운 감정의 이면일 수도 있다. 인적 없는 “마루 밑의 웅크린 어둠”도 그늘처럼 이중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뒷목이 서늘한 추녀 끝”이나 “겨울의 발톱이 빠지고” “눈이 침침한 대추나무” “바람의 성대만 늙지 않았다”등 빈집을 에워싼 환경들도 위에 언급한 감정 내지는 시적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보이는 상황을 옮겨오되 상상력이 가미되고, 그 상상력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시적 정서는 시인이 의도하고자 하는 의미와 이상에 연결된다. 앞서 언급했듯, 자연의 범위는 넓다. 또한 자연은 무궁무진한 시적 대상이다. 자연과 인간이 주고받는 대화 혹은 노래가 한편의 시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적 소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 문학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된 심리상태 혹은 인간과 연결된 정서가 하나의 소통대상이 되어 나타난다. 자연과 시인간의 동화, 혹은 합일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삶에 대한 성찰이 대상으로 이동해야만 새로운 시적 의미를 얻을 수 있다.

 

날개 끝에 눈동자를 새긴 부처사촌나비

다급하면 부처의 사촌답게

일곱 개의 눈알을 천적에게 공손히 내민다


제일 먼저 공격을 당하는 급소

머리는 얼굴에 눈(目)을 심고 소중히 모신다

--- (중략)---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아버지도

생선 눈알을 파먹었다

눈알이 사라지는 순간 생선은 밥상에서 또 한 번 죽었다

시력이 좋은 아버지 십리 밖까지 내다보더니

젓가락을 놓치고 앞이 흐려졌다

눈을 부릅뜬 위협에도

천적에게 내어줄 눈알무늬가 없었다

뒤편의 적을 노려보는 경고

물고기도 날개 같은 지느러미에 가짜 눈알을 그려 넣는다
-「가짜 눈알」전문

 

 시는 과학적이어야 한다. 이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한다는 뜻,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사물이나 생명체의 생김은 물론 성질까지 사실에 염두를 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가 과학과 다른 것은 대상에서 도출해내는 결과, 즉 과학적 사실을 벗어난 시적 의미가 부여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시「가짜 눈알」에 등장하는 ‘부처사촌나비’에 대한 과학적 혹은 생물학적 특성을 시인은 놓치지 않고 있다. 부처사촌나비의 생김새나 성질 등 생물학적인 것을 시에 슬쩍슬쩍 흘려 넣어 도감을 펼치지 않아도 연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시인은, 그것을 시인주변으로 끌고 온다. 그것에 시인만의 시적 사유를 보태 감동까지 추가하는 것이다. 생김새가 흡사 나방과 비슷한 부처사촌나비를 바라보는 시선은 “부처”에 몰입하고, 그에 적절한 “공손히”와 “소중히 모신다”를 차용한다.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아버지”로 대상을 옮겨가는 시적 사유를 거쳐 의미를 꺼내놓는다.

 자연을 읽어내는 시인의 시적 표현은 소멸의 형식을 취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그 이유는 시적 대상에 시인의 마음이 가닿아 만들어내는 개성적인 시적 형상의 무늬 때문이다. 그 시적 무늬는 의도된 시각으로 재생된 것, 왜곡되지 않은 시각이 차용한 상상이 서로 동화되어 또 다른 의미의 무늬로 빚어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비슷한 속성을 따라가는 시적 특징보다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대상과 대상을 접목해야만 한다. 그리고 두 대상에 맞는 나름의 질서를 갖춰 따라가야 한다. 이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시적 의미의 무게를 보다 가볍게 하면서 시적 대상과의 자연스런 몸 나누기, 어느 시적 대상에라도 스며들어 공감의 끈을 잇는 일이다.

 다양하고 섬세한 시적 감각의 돌기에 둘러싸인 시인은 시에서의 감각이 왜 필요한지를 절실히 깨닫고 있다. 시인은 시적 대상과 한 몸이 되어 그것에 깊숙이 스며들어 조화를 이룬다. 그리하여 도출해내는 생의 의미내지는 이치를 생동감 있게 드러낸다. 탁월한 시적 감각은 대상에 대한 접목은 물론, 그것을 현실 쪽으로 끌고 가 시적詩的인 모습으로 변모시킨다. 이런 유연성으로 인하여 시적 파장은 길어진다.

 

 

 

나비와 태양은 은밀한 관계

태양의 편애로 이파리의 무릎보행은 꽃대로 기어오르고

변태를 거친 나비의 보행은 허공답보로 바뀌었다

 

가벼운 목숨들, 어서 빨리 볕에 날개를 구워 천적을 피해 날아야한다

정해진 접도(蝶道)의 길

쓴물을 삼키며 바닥에 무릎이 해진 나비族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흡수한 복사열로 하늘에 시동이 걸린다

공중부양이 가능한 체온들, 알맞게 구워진 순서대로 들판이 날아오른다

유충을 통과해 경공술을 익힌 무사들, 공중이 그들을 떠받든다

팔랑팔랑 빛의 조각들이 눈부시다

 

구름의 질투로

태양의 편애가 사라지면 비행은 취소된다

날개가 젖어 인분鱗粉으로 짝을 유인하는 구애도 휴업이다

짝짓기 후

대부분 죽음을 맞는 수컷들의 목숨으로 번식하는 나비의 나라

 

모처럼 태양이 온다는 전갈에 지금 들판의 일정이 분주하다

-「나비의 집열판」전문

“나비”와 “태양”은 불가분의 관계다. “비행”을 위한 필수조건이 태양인 것이다. 날개가 젖으면 “비행은 취소”된다. 그야말로 “휴업”상태가 된다. 그리고 “짝짓기”가 끝나면 대부분의 “수컷”들은 암컷 나비를 위해 제 몸을 희생한다. 예시에서 보듯, 시인이 생각하는 죽음은 이미 슬픔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시인은 죽음을 미화하지도 않고 슬픔으로 과장하지도 않는다. 죽음을 바라보는 담담함, 혹은 객관적 관찰은 죽음이 삶처럼 어떤 힘이 되지는 못하지만 살아가는 연속성의 의지의 실천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이는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시각이며 또한 죽음을 움직임이 없는 빛나는 정지라고 보는 시적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은 아래의 예시에서 보듯, “박주가리”와 “제주왕나비”와 “푸른어치”의 “식물, 곤충, 동물이 뒤섞이는” 삼각관계의 치열한 “생존전략”마저 냉철하게 접근하고 있다.

식물, 곤충, 동물이 뒤섞이는 계절

독을 숨긴 박주가리는 천연스럽고

독을 묵인하는 제주왕나비는 능청스럽다

----(중략)-----

죽다가 살아난 푸른어치

먹잇감의 목록에서 제주왕나비 이름을 삭제한다

삼키고 뱉는 생존전략

꼬투리 틈을 열고 새처럼 날아가는 박주가리 비행으로

제주왕나비, 박주가리, 푸른어치의 관계는 해마다 이어진다
-「그들의 삼각관계」부분

​ 시인의 시들은 현실도피를 꿈꾸는 일상의 단면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삶을 절실하게 느끼고 받아들인다. 또한 자세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지향은 세상을 뜨겁게 체험한다. 그러나 그 표현방법은 철저히 객관적이다.

삶을 에워싼 거추장스러운 포장을 제거하면 보이는 본질적 어둠을 시인은 가만히 응시한다. 복잡한 일상의 불필요한 겹겹을 벗겨내면 드러나는 본질에 그만의 안목을 들이대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재된 특성과 빛깔과 소리까지 모두 발견해 내 그것을 다시 분석, 자기만의 시적 표현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시간의 축적 속에 고인 감성까지도 찾아내는 시적 시선은사물의 여러 모습을 알아내게 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빛의 감별사, 소리의 감별사, 감정의 감별사다.

씨도 같다

한 배가 틀림없다

같은 체형, 같은 표정, 키는 달라도

나란히 한 가족이다

 

아비 없는 자식을 품고 타국으로 건너온 러시아 여자

불법체류자처럼 불안하다

 

위조한 서류를 감추듯

아이들을 뱃속에 집어넣고

얼른 몸을 닫는다

-「메트로시카」부분

 

 

러시아 목각인형인 ‘메트로시카’를 보며 시인은 “아비 없는 자식을 품고 타국으로 건너온 러시아 여자”를 떠올린다. 그녀는 “불안”을 달고 다니는 “불법체류자”신세. “위조한 서류”로 입국했기에 늘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 “씨”도 “체형”도 “표정”도 같은 그들은 “나란히 한 가족”인 셈이다.


간신히 귀퉁이만 붙어있다

하나이면서 각각인 포스트잇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접착력

‘물고’와 ‘놓고’의 중간, 적당한 힘이다

저 여백들,

미완성이다 누군가 속을 채워주기까지 그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볼펜이 내장을 빽빽이 채워 넣는다

양파, 미역, 달걀 한 줄, 삼겹살 두 근…

피와 살이 되고 근육이 될 것들이 장기臟器처럼 지면을 메운다

툭, 떼어내는 순간

탯줄이 끊어지듯 분리되는 메모지, 오늘이 생일이다

-「팔랑거리다」부분

 

 

“귀퉁이만 붙어”있는 “하나이면서 각각”인 ‘포스트잇’에 “빽빽이 채워”넣은 글씨를 “내장”혹은 “장기”로 보는 시각은 사물의 속성에 사람의 일상을 접목시킨 시적 시각이다.

「메트로시카」나「팔랑거리다」에서 보듯, 시인의 시적 태도는 절제된 언어를 차용한다. 일상에서 껴안고 가야하는 고뇌와 슬픔, 불안, 소외까지도 전략된 의미로 승화시키는 시인의 이러한 시적 태도는 대상의 깊은 속내까지도 탐색해 다시 의도된 사유를 거쳐 가게 한다. 이러한 시적 과정이 있기에 시들은 높은 평가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적당한 시적 긴장은 독창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기교에만 충실한 시들에게 일종의 경고내지는 충고를 주는 톡톡한 효과를 겨져온다. 새로운 방법론이 대두되어 시적 형식도 많은 변화를 거치긴 했지만, 적당한 긴장과 탄력 그리고 명확성은 여전히 시가 갖추어야할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의 시들이 건조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시들은 오히려 시적 태도에 낭만적 동경이 자리 잡고 있어 윤택한 시적 정서에 도달하게 함은 물론 그것 자체를 뛰어넘은 의미에 닿고자 한다.

고도로 배양된 정신이 지은 시의 집에 들어서면, 발걸음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감동 쪽으로 향한다.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시인의 시적 특성은 일상사와 사물이 한통속으로 섞여 발효되고 숙성된다. 시인의 자아가 대상으로 옮겨가거나 대상이 시인에게 다가와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은 뭉클한 감동과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세상과 시적 대상을 향해 활짝 열어놓은 감각에 와 닿은 것들은 피로와 고단함을 잊고 삶을 향한 열정으로 향한다. 삶에서의 안간힘이나 머뭇거림까지도 거침없이 승화시키는 시인의 시적 매력 속에서 삶은 긍정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이다.

 

 

 

최선옥 (시인. 평론가)

 

이화여대 졸업

시집 『누에, 섶을 뜨겁게 껴안다』외

평론집 『이 시인을 조명한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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