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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5 근로자문학상 은상] 풍란 / 권동욱

by 푸름(일심) 2022. 8. 5.

[2015 근로자문학상 은상]

 

풍란

 

                                                                                                                           권동욱

 

 

 

 

 지난겨울, 열린 창으로 한파가 들었다. 창문 단속을 잊는 바람에 풍란이 밤새 추위에 떨었다.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아도 잘 자란다기에 별 일이야 있겠냐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마음이 쓰였다. 한동안 베란다를 들락거리며 풍란의 상태를 살폈다.

 

 

 풍란이 내 집에 온지도 어언 10여 년이다. 선물로 받은 화분에는 샅을 드러낸 풍란 두 뿌리가 돌덩이에 묶여 있었다.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 탓에 처음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영양도 없는 돌에 뿌리를 붙이고 있는 꼴을 보자니 자식인 듯 애처로웠다. 금방이라도 탈이 날 것 같이 불안했지만 다행히 봄과 여름을 무사히 견디더니 새 뿌리를 내려 주었다. 국수 가락같이 희고, 통통한 뿌리는 돌덩이에 붙으며 차츰차츰 내 집에 정착했다.

 

 

 오월이 오면 풍란은 내 눈을 즐겁게 했다. 지난 해 내린 꽃대 다음 마디에 새해의 꽃대를 내리는 데,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옅은 미색에 자주색 점이 주근깨처럼 박힌 꽃들을 다투어 가며 달았다. 다섯 갈래의 꽃잎 중 맨 아래의 잎을 슬쩍 뒤집어서 나름의 맵시까지 뽐냈다. 한눈에 마음을 사로잡는 풍채는 없어도, 그 자태는 때깔 고운 처녀처럼 단아해, 시집 올 때 아내의 모습 같았다.

 

 

 그런 풍란이 봄이 익어 가는데도 좀처럼 생기를 찾지 못했다. 새 순을 틔우지도, 새 뿌리를 내리지도 않았다. 뒤 늦게 그늘 막을 치고 영양제를 뿌려도 낯빛은 변함이 없었다. 그간 어려운 고비를 견뎌 온 저력을 다시 보여주길 기도했으나, 잎 몸에 그늘이 지는 가 했더니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말라 들었다. 혼자서는 물 한 모금 얻을 수 없지만, 가끔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도 끄떡없던 풍란이 이렇게 쉽게 죽을 줄은 생각 못했다.

 

 

 죽음은 생명이라는 조그마한 우주, 그 속에 담긴 꿈이 사라진다는 뜻일 테다. 별처럼 반짝이던 기억들이 가뭇없이 저문다는 것이리라. 풍란의 잎을 닦으면서 나누던 교감은 물론, 내년에는 더 예쁜 꽃을 피우리라는 기대가 사라졌다. 더불어, 풍란이 형해(形骸)로 되면서 곁들여 살던 기물들조차 모양새가 사납게 되었다. 등허리를 내주던 돌덩이며, 그를 받치던 화분이 서로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강변 시늉으로 깔았던 자잘한 자갈이며, 초원이라 여겼던 이끼들도 주인 없는 집에 든 손님처럼 멋쩍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인이 사라지면서 그 유품들도 가치를 잃은 것이다.

 

 

 사실 나는 화분 종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에 맞춰 물을 주고, 햇볕과 바람까지 조절하자면 손도 많이 간다. 거기다가 뿌리를 자르고 가지를 꺾고 잎을 따는 등, 보기 좋은 체형을 만들려는 행위는 화초에게 고통을 주는 것 같아서 싫다. 생명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인지라 풍란을 볼 때 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처음 뿌리를 내린 자리에 있으면 마음껏 비바람을 마시며 제 명대로 살 텐데, 지금의 풍란은 남에게 의탁한 삶을 마무리하고 있다.

 

 

 청소를 하려는지 아내가 베란다로 왔다. 내가 지켜보는 화분을 기웃거리더니 혀를 끌끌 찼다. 아내는 그간 풍란에게 별반 애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지청구를 놓으면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물을 주곤 했다. 그래도 꽃이 피면 옹송그리고 앉아 함께 향기를 마셨다. 아내가 혀를 차면서 조의를 마치고 만 것은, 죽음이라는 달갑지 않은 사태에 달리 마음 붙이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을 게다. 어쩌면 화분 안에서 시들어버린 풍란과, 집 안에서 시들어 가는 자신이 동병상련으로 다가왔을지 모르는 일이기도 했지만.

 

 

 나이가 이슥해지면서 아내의 한숨도 잦아졌다. 말 줄기는 나긋해도 묘하게 끝이 갈라졌다. 가끔씩 마음이 무너지는 날에는 세간들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바람에 차이는 양동이처럼 모진 소리를 내었다. 까닭 모르는 불평을 늘어놓거나 소소한 일에 트집 잡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냥 흘려들었다. 오래된 외투처럼 삶의 언저리에 피는 보푸라기들은 시간의 부대낌에 마멸되고 풍화될 것이라 생각했다.

 

 

 알고 보면 아내의 흔적은 만만치 않다. 일상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걸어온 길마다 발자국이 찍혀있다. 자기가 자란 곳과는 다른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이 들기도 했겠지만, 아내의 촉수는 이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촘촘하다. 아이들의 옷자락, 손수건 한 장까지 손길이 스며있다. 나아가 내 마음 깊숙한 곳까지 실핏줄 같은 뿌리를 뻗었다. 그 그물의 힘이 물살에 떠밀리지 않는 울타리가 되었다. 아내가 없다면 나나 자식들이나 저 화분속의 기물들처럼 결속이 와해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살아간다는 시간 속에서 아내에게 나는 어떤 의미였을까. 아내는 윤기 나던 얼굴이 푸석해졌고 팽팽하던 몸은 탄력을 잃었다. 시집 올 때 풍란처럼 곱던 아내는 나를 위해 부단히 자신의 방식을 버렸다. 돌아보면 자기답게 피어야 할 아내를 내 방식대로 비틀고 내 취향에 맞추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나 또한 아내에게 맞추려고 나름 애를 썼지만, 생명력이 강한 여자라는 이유로 아무렇게나 방치하지나 않았을까. 아내를 바라보다가 그만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숲의 여린 비늘들이 자아내는 도약이 눈부시다. 들판에서 불어 온 초록 너울이 능선을 넘어간 지도 오래다. 앞산 마루턱에 현기증 같은 아지랑이가 인다. 발끝에 찰랑이던 봄은 그만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도록 깊어졌다. 만개한 아카시아, 영산홍, 조팝나무. 달뜬 봄날도 며칠 뒤면 꿈을 꾸듯 지나갈 것이다. 기화요초의 농염한 시위에 몸이 단 꿀벌들도 고단한 날개를 쉬고, 솜털 오붓한 새끼딱새도 한층 어린 티를 벗을 것이다.

 

 

 색깔은 꽃의 언어다. 누군가의 꿈이 꽃으로 핀다면 아내의 꿈은 무슨 색으로 피었을까. 노랑, 분홍, 자주. 어쩌면 옅은 미색에 자주색 점이 주근깨처럼 박힌 소담한 풍란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여보, 우리 꽃구경이나 갈까?”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뜬금없는 말에 아내가 되물으며 빗자루를 든다. 아내의 얼굴에 슬그머니 화색이 돈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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