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창작법과 교수

처음 시를 배울 때 고쳐야 할 표현 4 /도종환

by 푸름(일심) 2022. 7. 21.

4. 관념성과 불필요한 난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간다
무한한 공간 속으로
닫혀 있는 창을 열고
雨의 장막을 넘어
나는 간다

영원한 침묵 속으로
저자 거리의 소음을 뒤로 하고
검은 숲 오솔길을 걸어
나는 간다

절대의 고독 속으로
닫혀 있는 창 너머로
누구와도 아닌 홀로서
순수 이전으로 돌아간다.

- 「순수 이전으로」

a--a'--a" 형식으로 씌어진 이 시는 '나는 간다, 어디 어디로.' 의 기본 골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시적 화자인 내가 가는 곳은 '무한한 공간' '영원한 침묵' '절대의 고독' 속이다.
그곳을 작자는 순수 이전의 곳이라고 한다.

순수 이전의 곳, 그러니까 지금 순수한 곳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그 어떤 곳으로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순수 이전의 곳이라는 무한한 공간, 영원한 침묵, 절대의 고독 등은 대단히 관념적이다.
雨의 장막도 마찬가지다.

'닫혀 있는 창을 열고' '저자 거리의 소음을 뒤로 하고' '누구와도 아닌 홀로서' 가는 길이라면
죽음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죽음의 세계는 절대 순수의 세계일까.
문제는 이 시의 시어들이 육화되지 않은 관념성에 빠져 있다는데 있다.


미지에의 두려움에 망설이며
되돌아갈 수 있는 줄 알았던 이 길이
그러나
길은 앞으로만 뚫려 있고
등 뒤엔 이미 수렁
나의 사색은 병약했으며
암흑에 가두었고
고통일 뿐이던 젊음
삶과의 치열한 투쟁
그러나 자신의 밀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묶여 있던 감각 굳어 있는 뼈마디
나는 그것이 어둠인 줄도 몰랐었다.

- 「봄」 중에서

나약하던 자기의 밀실을 깨치고 나오는 어느 봄날의 기억에 대해 쓴 시이다.
이런 자각과 깨달음을 통해 역사를 알게 되었고 쓰러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이 시의 뒷부분에 이어진다.

그러나 어딘지 미더웁지 못한 데가 있다.
바로 지금 이 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육화되지 않은 언어들 때문이다.

'사색' '병약' '암흑' '투쟁' '밀실' '감각' 등의 관념적인 시어들은 삶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느낌보다는 삶과 언어가 따로따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