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시 , 감상시

[스크랩]현대시 100년 위안의 詩_김선우_‘목포항’

by 푸름(일심) 2022. 8. 5.

현대시 100년|위안의 詩_김선우_‘목포항’

 

 

080725

목포항

김선우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개 바늘은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비평 )

 

 

 

 

 

 

사는 일이 암담할 때가 있다. 오래된 상처들이 덧나고,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고 살고 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되는 날들. ‘목포항’은 그런 날에 ‘내’가 끌리듯 가 닿은 곳이다.

목포항은 흡사 ‘나’의 내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을 하고 있다. 막배 떠난 항구는 스산하고, 대기실에는 노파가 쪼그려 앉아 짓무른 복숭아를 판다. 아프고, 안쓰럽고, 다시 아프다.

상처받은 자들은 특별한 행위보다 서로의 존재 자체로 위로받는다.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상처받은 자는 이미 위로받은 자이고 어느새 위로하는 자이다.

김선우가 목포항에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을 보게 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인적 끊긴 항구, 가난한 행상 노파, 짓무른 복숭아의 내력을 김선우는 ‘내 몸속의 상처’의 통증으로 느낀다. 상처는 타인에게로 가는 출구이고, 타인을 경유해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입구이다. 이 출구와 입구가 이어져 우리의 삶의 길을 이룬다.

타인의 상처를 내 것으로 느끼는 마음이 사랑임을, 삶의 푸르고 비릿한 생명력임을 뜨거운 ‘심장’으로 간파하는 것은 이 1970년생 젊은 여성 시인의 출중한 능력이다. 상처 난 가슴속에서도 따뜻하게 뛰는 심장을, 김선우는 상한 복숭아를 고르던 그 손으로 정확히 찾아낸다.

목포항은 ‘상처=사랑’의 제의가 열리는 곳이다. ‘가슴팍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을 제물 삼아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비는 곳. 이상하게 우리를 위무하는, 더 큰 상처를 품으려는 이 비장한 결심의 이름은 바로 ‘사랑’이다.

김수이 _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 동아일보 & donga.com,

 

 

 

김선우시인출생 1970년 (강원도 강릉)학력 강원대학교 국어교육학 학사데뷔 1996년 창작과 비평 시 '대관령 옛길'수상 2007년 제9회 천상병시상

 

1996년『창작과비평』겨울호에「대관령 옛길」등 10편의 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도화 아래 잠들다』가 있으며, 2004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시힘' 동인이다.

 

 

낙화, 첫사랑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김선우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에서>
 
 
Irises. 1914-1917. oil on canvas.
Musée Marmottan Monet, Paris 
이미지|네이버_지식in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김선우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풀여치 있어 풀여치와 놀았습니다

분홍빛 몽돌 어여삐 몽돌과 놀았습니다

보랏빛 자디잔 꽃마리 어여삐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흰 사슴 마시고 숨결 흘려놓은 샘물 마셨습니다

샘물 달고 달아 낮별 뜨며 놀았습니다

새 뿔 올린 사향노루 너무 예뻐서

슬퍼진 내가 비파를 탔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잡아주고 싶은 새들의 가녀린 발목 종종거리며 뛰고

하늬바람 채집하는 나비 떼 외로워서

멍석을 펴고 함께 놀았습니다 껍질 벗는 자작나무

진물 환한 상처가 뜨거워서

가락을 함께 놀았습니다 회회나무 명자나무와 놀고

해당화 패랭이꽃 도라지 작약과 놀고

꽃아그배 아래 낮달과 놀았습니다

달과 꽃의 숨구멍에서 흘러나온 빛들 어여뻐

아주 잊듯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대 잃은 지 오래인

그대 만나러 가는 길

내가 만나 논 것들 모두 그대였습니다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김선우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에서>

 

 

이미지_  임정일(skyman63) 시인님

 

 

거꾸로 가는 생

김선우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혹은 그렇게 느끼고
나이 마흔의 누이는 가을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어도
갈래머리 여고생처럼 후르륵 가슴을 쓸어 내리고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 살배기 아이처럼 졸라대고
여든에 죽은 할머니는 기저귀 차고
아들 등에 업혀 침 흘리며 잠 들곤 했네 말 배우는 아기처럼
배냇니도 없이 옹알이를 하였네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머리를 거꾸로 처박으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골목길 걷다 우연히 넘본 키작은 담장 안에선
머리가 하얀 부부가 소꿉을 놀 듯
이렇게 고운 동백을 마당에 심었으니 저 영감 평생 여색이 분분하지
구기자 덩굴 만지작거리며 영감님 흠흠, 웃기만 하고
애증이랄지 하는 것도 다 걷혀
마치 이즈음이 그러기로 했다는 듯
붉은 동백 기진하여 땅으로 곤두박질 칠 때
그들도 즐거이 그러하리라는 듯

즐거워라 거꾸로 가는 생은
예기치 않게 거꾸로 흐르는 스위치백 철로
객차와 객차 사이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터저 나오는
강릉 가는 기차가 미끄러지며 고갯마루를 한순간 밀어 올리네
세상의 아름다운 빛들은 거꾸로 떨어지네

 

 

편집| seorabeol_T.H.S

 

 

 

 

출처 : 서라벌블로그입니다
글쓴이 : 서라벌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 감상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 강원문학 신인상 당선작 2014. 8. 19.  (0) 2022.08.05
  (0) 2022.08.0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