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강원문학 신인상 당선작/엄인옥
동강 경춘아리랑 외 4편
낙화암이 곁을 준 “월기경춘순절비”
그 머리 위로 해가 뉘엿뉘엿 질 때
붉은 낯 감춘 장옷 자락의 긴 그림자
거문고자리가 머물다간 흔적과
생의 날刀을 세워 동강에 뛰어든
그녀의 손을 놓아버린 시간을 지운다
동강 저편 나룻배에 감춘 안의 소리
비오리가 전하는 전설 들을 때
어둠이 그녀의 정맥 같은 물 위를 걷는다
명은 인중의 길이 속에 이미 정해졌다
땅을 비켜 붉은 진흙보다 더 차진 눈물로
그녀가 바위 벼랑을 어루만지면
별마로천문대는 하늘로 가는 길 연다
먼 길 돌아와 물 만나게 되는 그 날
달은 길을 열어 목을 축이는 밤이다
노송은 거꾸로 서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달이 추는 마지막 춤사위 별빛 사랑가 듣는다
노옥은 그 가락이 지는 자리에 서 있다
그녀의 혈이 벼랑 위 바위틈에서
보랏빛 동강할미꽃으로 하늘을 우러르는 동안
바람은 봄마다 그녀의 빗장뼈를 음각한다
강은 구불구불한 기억뿐
몇백 년 물길 거슬러 자진모리로 부르는 신춘향가
득음 했는가 동강 경춘아리랑 골골이 들린다
신 풍요豊謠
허수아비 업고 휘청거리는 바람
싸리 울타리에 갇힌 문화재 깨운다
다 닳은 디딜방아 같은 삼대독자
가장의 관절은 숨 고를 틈 없이
확을 오르내리며 생을 깁던 무한궤도
된비알 같은 그 방아다리에
건들거리는 바람이 쪼그리고 앉아
찧고 빻던 시간을 한 움큼씩 덜어낸다
어레미에 거른 무거리처럼 겉도는 아버지
견고하던 정신 그 내력의 볼씨는
마당 한켠 싸리비 같은 구부렁한 그림자
도랑물 소리에 귀 올려 발자국 부른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방앗공이
확의 온기, 그 굄이 절절한 아버지
낡은 시렁에 뭉클뭉클한 그리움 걸고
허리 늘어뜨려 방아 줄 잡아보는 날
이엉 틈새로 염화시중 미소 닮은 보름달이
허름한 괴밑대에 턱을 괸 채
다 닳은 공이를 애처롭게 바라보다
사이시옷 걸치고 중력을 부른다
마른기침하는 소주잔에 기댄 껍질은
밀고 당기며 벗은 낟알을 그린다
해가 짧아진 싸리 울타리 안에서
외로움 올려 시간 바수기 하는 디딜방아
금강송
대관령 바우길 따라 걷는다
산 능선이 포개져 누워 있는 선자령
별은 푸르다 못해 떨어질 듯 위태롭다
어사화 쓰고 주검이 된 금강송
아스라한 망루에 당백전을 깔고 누웠는가
그의 환생은, 태아 적 발아의 솔
들깨 씨 반쪽만 한 울음이다
대공 산성, 혹은 강릉 앞바다를 바라보며
하늘 귀퉁이를 열고 튀어나올 듯
신들의 숨소리 그윽하다
“御命亭”
보현사 풍경소리 천 년의 획을 긋는데
어명이오, 어명이오~!
곤신봉에 울려 퍼진 여섯 번의 어명 소리
지난밤 자미두수를 보았는지
한밤중에 받은 교지에 이슬이 촉촉하다
“그대의 몸을 베겠소”
울퉁불퉁 살갗 벗겨진 자리에 ‘山’
그의 몸통, 하늘째 무너지는 순간 쿵-
끝내 지키지 못한 그의 뼈와 살
나이테가 쓴 사조, 그 깊은 소리의 결
진혼곡으로 타오르는 적황색 속살
바람이 수런거리는 백두대간 숲에서
선자령 허리춤에 망루 하나 지어놓고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 기둥이 된 그대
너럭바위에 머문 선인들의 흔적 따라
백 팔 계단 밟고 대공 산성 넘나든다
유리관 속 그의 뿌리 경복궁을 향하는데
근정전에 감돌아드는 사관의 붓끝이
다시 천 년의 획을 긋는 금강송, 그 사직
옛길 걷는 거푸집
고대 이집트 동굴 벽화 같은 대동여지도
춘천의 옛 지도를 따라 석파령을 넘는다
가마 타고 넘지 못했던 그 길, 눈으로 걷는다
후두두 빗방울 떨어지는 강기슭
선인들의 발자국 같은 뗏목 띄워놓고
들머리 길섶 따라 흔적 훑는다
로렐라이 언덕인 듯 인어상에 기대앉아
문인의 길 그은 유정 그 물길에 휘감겨
신연 강에 흠뻑 적신 붓끝
바람을 방목해 비색의 물무늬 그린다
조붓이 타로점 보는 칡넝쿨 그 너머
봉덕사에 차고 맑은 약수 그리는 여승
강물 굽어보는 삼악산 중턱, 새집 같은 산장이
계절 겹겹이 벼랑의 매듭 풀어
발끝 세운 암 등이 밧줄을 당길 때
뒤를 돌아보면 신연 강 협곡이 낳은 의암댐
갯지렁이 따먹는 용늪의 향가
인공 호수에 붕어섬이 뱃놀이를 즐긴다
눈 둘 곳이 아찔한 산 어깨에
절벽을 품은 노송이 손가락질하는 곳
왕건이 껴입은 갑옷 같은 구름이
충신 신숭겸 묘역에 잡상 그리는 빗방울
수레너미 길 따라 석파령을 빨갛게 쓴다
삼악산 정점 찍고 넘겨보는 등선폭포
젊은 연인들이 곁눈질하던 강촌 구 역사가
다산의 ‘산행일기汕行日記’ 읽는 듯
오싹 팔뚝에 씨눈 품은 강변 정취
팔선녀가 양소유를 깨우는 몽夢처럼
강어귀에 다시 꿈틀거리는 유정의 예술혼
그 정령이 거푸집을 짓는다.
옛길 따라 멋모르고 든 내 유배지
가을꽃
달맞이꽃 위에 허리 뉜 대관령 자락
한 시대 마지막 불문율, 종부 그 자리
금강초롱같이 영롱할 때 건너와
종갓집 부엌, 상차림은 늘 지각변동
억새꽃 닮은 문지방 그 허리에
쇠덕석을 빌려 입고 넘나들던 걸음걸음
관절 마디마다 낡은 치마폭이 감싼
멍에대끝장식에 꿰어진 고비, 그 고삐
부처꽃처럼 촘촘하던 종갓집
용담도, 엉겅퀴처럼 날을 세운 시모도
호랑나비처럼 왔다 간 그들조차
뼛속에 쟁여 넣은 종부 그 자리
오랍들이에 벙글거리는 도라지꽃과
닭의장풀꽃이 곁을 준 그 보랏빛이야기
뒤란 댓돌 위에 달빛이 내려와
잿빛 고무신 한 켤레 가져간 날
보라색 각시투구꽃으로 갈아입고
노루 고라니 마중하는 골짜기
산부추 꽃등 밝힌 풀덤불 속에서
온기 채우는 며느리밥풀꽃 그 빨간 무덤 꽃
가을꽃 껴입은 창호지, 그 압화 같은 종부의 낟가리
환삼덩굴이 생을 감아올리는 헛뿌리에
툇마루 괘종시계 추 홀로 생의 태엽을 감는다
'좋은시 , 감상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현대시 100년 위안의 詩_김선우_‘목포항’ (0) | 2022.08.05 |
---|---|
눈 (0) | 2022.08.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