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오면
꽃샘바람이 불면서 시작되는 새 봄 엔 어김없이 나를 뒤돌아보게 하는 일이 생각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가지 생각나는 일들이 있지만 나에겐 평생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나의 생활신조로 여기며 살아온 아버지의 말씀이 봄 만되면 새싹이 움트듯이
그렇게 꿈틀거리며 아버지를 다시 그리웁게 한다.
그도 그럴것이 음력 정월 대 보름날 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이고 조금지나면 4월이오는데
내가 시집가던 달이 4월 이다.
시집가기 전날밤 아버지는 나를 조용히 불러 앉아보라 하셔서 무슨말씀을 하시려나 기다렸다.
아버지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는 나는 괜한 눈물이 와락 쏟아져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아버지는 살며시 내손을 잡으시며 말씀을 하셨다.
" 이 애비 의 말 을 들어보렴 "
여자가 장성하여 출가하면 그집식구가 되는것이야.
이젠 에미. 애비 는 걱정말고 시댁 가풍에 따라 잘 섬겨야 한다.
자고로 사람이 잘 들어가야 그 가정 이 번창하게 되고 화목하게 된다 .그래야 귀염받는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웃을수도 있고 울수도 있다며 화목을 강조 하셨다.
어릴적 늘 몸이 허약하여 애비 속을 태우더니 이렇게 시집가니 이 애비는 기쁘다 며 눈시울이 붉어지시며
억지로 참는것을 아버지의 어깨가 움직이는 느낌으로 알수있었다.
나는 농부의 딸 로 6 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는데 어찌나 병치레 를 잘 하는지 사람노릇 제대로나 할까?
노심초사 늘 마음 놓을날이 없었고 시골의사 의 손에 컷다고 하리많큼 병원을 들락거렸다 한다.
연년생인 동생을 두었기 때문에 할머니 등에 때론 삼촌의 등 에 업혀 밤낮으로 뛰다시피 병원문턱 을 달도록 다녔는데
시집을 간다니 아버지의 심정이 오죽 했으랴.!
.그때만 해도 천수답만 바라보는 농촌에서 상급학교 진학 은 꿈도 못꾸는 시골인데 중학교 진학하는 아이들은
손 꼽을 정도였고 계집애는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된다고 하든 시대라 여자 아이 는 삼동네에서 나를 포함해서 한명씩 3명이었다.
중학교 옆에 교회가 하나 있었고 목사님이 계셨는데 목사님 댁 에는 양 이 두어마리 있었다.
어찌 아셨는지 아침마다 목사님 댁에가서 우유 한잔씩 먹으면 된다고 하셨다.
아마도 몸이 약한 딸 걱정에 우유 받아 먹이신것 이었음을 늦게 철 들고서야 알았다.
그런 아버지를 떠난다 생각하니 눈물은 한없이 쏟아졌다.
비록 아버지는 농부이셨지만 앞서가시는 분이셨다.
천일염 이 나는 염전이 있었는데 염부장 을 오랫동안 하셔서 월급을 타셨고 머슴을 둘씩이나 두어 농사며 바다에 고기를 잡아
팔아서 넉넉한 살림을 하셨다.
그렇게 6 남매를 키웠고 과수를 심어 풍성하게 이웃들이 오면 한 광주리 씩 내놓아 후한 인심을 얻으셨다.
나이가 차차 들어감에 따라 아버지의 교육이 뼈에 사무치도록 생각나는데 지금 내 곁에는 아버지가 안 계신다.
이제야.아버지의 교육하셨던 말씀들이 알것같은데 내 곁을 떠나신지 올해로 9 년이 된다.
이제서야 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자세가 되었는데...
살아생전 에 아버지의 훈계가 잔소리같고 때론 도리질하던 그얘기들이
이제사 가슴으로 들려오는데....이젠 재 너머 불어오는 바람결에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싶어
바랍결에 들리는 음성을 따라 뒤돌아봐도 그리운 아버지는 내 가슴에 계실뿐 .
그래서 4월이면 언제나 옛 추억이 되살아난다.
아버지가 그리울때면 하늘을 쳐다보며 아련하게 떠오르는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 봅니다
아버지~ 보고싶습니다.
2011年3월3일. 아버지의 맏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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